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의 티베트 침공 (문단 편집) === 17개조 협정 이후 ===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 체결 뉴스를 듣고 아보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지만 [[판첸 라마]]는 5월 30일에 달라이 라마에 대하여 중국 정부의 지도하에 티베트 정부에 협력한다고 표명했다. 한편 아보는 이후 티베트에서 [[을사오적|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1951년 7월에 라싸 주둔 중국군 사령관인 장징우 장군이 야톤을 방문해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망명]]하여 협정의 무효를 외치라고 했지만 많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복귀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라싸로 돌아가 협정에 기초한 개혁에 추진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9개월만인 9월 6일 라싸로 돌아왔는데 3일 후 3천명의 중공군이 라싸에 진주했다. 10월 24일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을 승인하며 인민해방군의 진주를 지지한다>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이후 중국이 티베트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크게 이용되었다. 중국은 다리와 도로, 학교를 건설했지만 동시에 불교 성직자들의 권위를 깨뜨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전통 문화와 티베트 엘리트층의 파괴는 물론 엄청난 인권 침해를 수반했다. 1959년 무렵 티베트인들의 분노는 민족 봉기로 이어졌고 중공은 이를 무력으로 가혹하게 제압했다. 유엔과 긴밀하게 연결된 [[https://en.wikipedia.org/wiki/International_Commission_of_Jurists|국제법학자위원회]]는 1959년 티베트의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티베트에서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유엔 총회는 1959년, 1961년, 1965년에 티베트인들에 대한 인권 침해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도출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출처 : 모리 카즈코 <주변국가와 중국>, 마이클 우드 외 3인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days>]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3E3YvCe0j0)]}}}|| || 1959년 티베트 봉기의 노래인 "Mimang Langlu".[br]당연히 [[티베트 자치구]]와 중국에서는 강력한 [[금지곡]] 중 하나다. ||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티베트 문화유산이 대거 파괴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